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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아빠가 페미니스트여야 하는 이유

2019.02.25 한기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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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최승범 선생님이 쓴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책을 읽고 큰 박수를 보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란 구호는 이제 여성의 티셔츠에 등장하는 흔한 페미 굿즈(goods)가 됐지만, 우리 사회에서 자칭 ‘남페미’(남자 페미니스트)임을 커밍아웃하기엔 조금 눈치를 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란 용어는 아직까진 불편하게 유통되니까.

저자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남성들이여. 역차별이니, 어쩌니 불평하는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며 페미니즘을 공부해라. 수년 전부터 한국 사회를 강타한 페미니즘 물결이 결코 이상한 것도 신기한 것도 아니다. 기왕 올 세상이니 빨리 두 팔 벌려 환영하자. 이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면 당신은 도태되고 말 것이다.”

그는 먼저 보통의 남자들처럼 묻는다. 남자라고 해서 좋은 것도 딱히 없는데, 오히려 군대 가서 개고생하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책임을 떠맡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페미니즘은 여자들의 엄살이고 역차별 아니냐고? 그는 그게 아니라는 대답으로 남성의 이중적 사고를 고발한다.

딸과 아내에게 호신용 스프레이를 사주고, 밤 12시에도 안 들어오면 안절부절 못하고, 공중화장실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건, 남자 스스로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남성 성범죄자들의 면모를 보면 대체로 집에선 자상한 아빠, 모범적 가장이다. 한국은 선진국 중에서 남녀평등을 말하는 유리천장지수가 아랍국가보다도 낮은 최하위다. 아이들은 아내가 돌봐야 한다며 육아를 떠넘기지만, 직장에서 여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내면 비난한다. 운전이 미숙한 여자는 ‘김여사’라고 조롱하지만 교통사고 발생 비율은 남자가 3.3배나 많다. 한국 남성은 여성의 완곡한 NO를 YES로 해석한다. 강제로 여성의 팔을 잡아끌면 납치, 싫다는데 회사 앞에서 기웃거리면 스토킹, 벽에 밀치고 키스하면 폭력인데 그걸 남자답다고 자랑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장담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남성들이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여성들이 권리를 ‘지나치게’ 주장하고, 정서적 육체적으로 여성이 지닌 특징을 스스로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편견이다. 2014년 미국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온 페미니즘 명저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는 과거 자신이 페미니즘에 대해 가졌던 오해를 이렇게 솔직히 표현했다.

“그 시절 누가 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최초로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그렇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데. 나, 남자한테 오럴 섹스도 해줄 수 있단 말이야. 성깔 있지도 않고, 남성을 혐오하지도 않는데.” 록산 게이는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그런데 최승범 선생님은 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 그의 결론은 한 마디로 이것이다. 나는 이 말이 가슴에 참으로 와 닿았다. 남자들이라면 곰곰 생각해 볼 말이다.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돼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페미니즘이 남성의 삶과 맞닿아 있으며 여성만큼이나 남성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늘 강해야 하며 가부장의 역할이나 의무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강박에서 페미니즘이야말로 남성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가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남녀가 완벽하게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교과서적인 말보다 울림이 있었다.

‘맨박스(manbox)’라는 용어가 있다. ‘모든 남성이 꼭 봐야 할 TED 강연 TOP 10’에 이름을 올린 미국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가 한 말이다. 그는 ‘맨박스-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2016년 국내 출간)이란 책을 썼고, ‘A call to men’이라는 유명한 TED 강연을 했다.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강인하고 터프한 ‘남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맨박스라고 불렀는데, 남자들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것부터 의심하고 깨부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들은 맨박스 안에서 결속감과 안도감을 얻고 있는데, 남성의 삶 깊숙이 스며든 맨박스야말로 남성의 삶을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의 삶 속으로도 파고들어 여성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맨박스의 가장 큰 부작용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원래 본능적이고 저돌적이니 조심하지 않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그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는 대다수 남성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남성들이 남자답기 위해 여성을 타자화하는 방법으로 잘못 교육받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통 남성들의 침묵은 폭력의 승인이나 마찬가지이며, 여성 폭력 문제는 모든 남성 개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에는 딸바보를 자처하는 수많은 아빠들이 있다. 미투의 세상에서 진정 딸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 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고 사위에게 “딸을 잘 부탁하네”라고 말해야 할 게 아니다. 이 땅의 아빠들은, 남성들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불평등과 차별에 기꺼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가정과 학교는 여자들에게 호신술만 알려줄 게 아니라, 나머지 절반인 남자들에게 공격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딸을 걱정만할 게 아니라 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지금 그 누구도 페미니즘에 반대할 수 없다. 그들의 외침을 막을 수도 없다. 그들의 사상을 검열할 수도 없다. 페미니즘은 기실 사상도 철학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그냥 생활이자 인간적 삶의 문제다. 여자도 남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어느 경우에든 똑같이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그뿐이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바라보면 남자와 여자 모두가 잃는 게 많다. 남성도 발언해야 한다. 여성들 시위에 동참해야 한다. 남페미임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

UN 여성 친선대사인 배우 엠마 왓슨은 2014년 유엔에서 ‘HeForShe’ 캠페인을 시작하며 유명한 연설을 했다(요약).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면 할수록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종종 ‘남성에 대한 증오’와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같은 현실을 바꿔야 합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양성평등은 바로 당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남성들이 성공이라는 왜곡된 의식에 의해 부서지고 불안정해지는 것을 봤습니다. 남성들이 이런 성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여성들을 위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남성들이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은 지배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성과 여성 둘 다 세심하다고 느낄 자유가 있어야 하며, 남성과 여성 둘 다 강하다고 느낄 자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가 다른 것으로 정의를 내리지 말고, 우리가 누구인지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한기봉

◆ 한기봉 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를 가르쳤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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